Tuesday, February 4, 2014

은유 또는 직유

소설의 첫 단락에 "경의를 표하는Deferential 종려나무"라는 표현이 나온다. 종려나무는 물론 '경의'를 표하지 못한다. 이것은 물론 은유적 표현이다.

메타포의 공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. X 는 Z라는 점에서 Y와 같다. X(종려나무)는 Z(아랫사람이 윗사람 시중을 들어 부채질을 하거나 양산을 받친다)라는 점에서 Y(경의를 표하는 것)과 같다.

직유는 드러낸 비유이고 은유는 숨겨진 비유다. 모든 은유는 비유로 전환될 수 있다. 그러나 그 효과는 다르다. 예를 들면:

The ship plows the waves.
'배가 바다를 갈고 있다'라는 문장은 은유다. 이것을 직유로 고치면 이렇다:

The ship goes through the waves like a plow plowing the land.
'배가 밭을 가는 쟁기처럼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.'

대개 이런 문장의 번역은 plow의 사전 정의 중 하나를 적용해 '배가 바다를 가르며 나아간다"고 한다. 그러면 은유의 생생함은 사라지고 심지어는 직유마저 나타나지 않는다.

한편 직유로 나타내더라도 은유가 함축할 수 있는 다양한 의미가 축소된다. 그뿐 아니라 은유는 직유에 비해 간결하다.

한국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한국 소설에는 은유적 표현이 상당히 빈곤하다는 생각이 든다. (한국 문학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때문인 듯하다.) 번역에서는 은유가 직유로 표현되는 일이 많다. 많은 은유적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텐데, 그때문에 그런 것들을 직유로 번역하거나, 더 나아가 평이하게 풀어 옮기면 그 작품은 그만큼 빈곤해진다.

그래서 '경의를 표하는 듯하는'이나 어떤 다른 번역이 아니라 '경의를 표하는'이 될 수밖에 없다.

그럼에도 항상 갈등한다. 독자를 의식해 은유를 은유로 번역할지 말지를 놓고 . . 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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